
저는 혼자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가 정해준 방식이 아니라, 제가 선택한 방식으로요. 그 과정을 ‘자립’이라고 부른다면, 저는 이제 막 그 첫 장을 넘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자립주택(들판 1호)에서 4년 6개월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천도시공사 전세임대주택에 입주해 혼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사를 두 번 한 게 아니라, 제 삶의 자리를 옮긴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돌봐지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사는 사람이 되는 자리로요.
사실 저는 예전부터 자립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허락하셔야 하지 않냐.”, “너 혼자 할 수 있겠냐.”라는 말들이 항상 저를 막았습니다. 저는 동암에 있는 장애인보호작업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일하는 곳이라기보다 붙잡아 두는 곳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적은 임금 중에서도 ‘후원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떼 갔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꼈습니다. ‘왜 우리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쌓이면서 저는 그곳을 나오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반대가 컸습니다. “그나마 거기라도 다녀야지.”, “괜히 나와서 더 힘들어지면 어떡하니.” 자립을 꿈꾸는 마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센터에서 동료상담가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조모임 관리도 하고, 다른 장애인 동료들의 고민을 듣고 함께 길을 찾는 일도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하면서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제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센터에서도 저는 차별과 인권 침해를 겪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들어간 곳에서 모욕을 겪으면서, 저는 오히려 더 확실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설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 무렵 저는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보치아 자조모임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모임의 동료상담가가 저에게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자립주택 입주를 권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여기 들어가면 이제 진짜로 집을 나오는 거니까. ‘정말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작은자야학 선생님들도 “가 보자, 네가 살 집이 있어야 네 인생이 시작된다.”고 등을 떠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부모님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혼날 각오를 하고 말했습니다. “나 자립주택에 들어가고 싶어.”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왜 이제야 얘기를 했냐?” 화가 아니라, 답답함이 섞인 말이었습니다. 반대한 게 아니라, 오히려 “민들레로 들어가라.”고 등을 밀어 주셨습니다. 어머니도 기뻐하셨고, 주변 어머니들에게까지 소식을 알려서 “우리 아이도 소개해 줄 수 있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제가 보호작업장을 나오는 걸 무서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했다, 잘 나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 활동과 장애인 인권 운동을 누구보다 크게 응원해 주십니다. 가족도 변한 겁니다. 저만 변한 게 아니라.
자립주택에 입주하고 처음에는 솔직히 쉽지 않았습니다. 활동지원서비스를 당장 받지 못했던 시기에는 빨래와 반찬 같은 기본 생활이 큰 과제였습니다. 초반에는 빨래나 반찬을 부모님 도움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빨래는 제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내가 해 볼게.” 그래서 빨래는 스스로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반찬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그게 ‘살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했습니다.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으면서 제 삶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건 단순히 집안일 도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이거 먹어.”라고 준 걸 그냥 먹는 사람이 아니게 됐습니다. 이제는 “오늘은 이 반찬 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내가 고르고 요청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빨래, 청소도 이제 활동지원사님과 함께 조율합니다. ‘부탁한다 → 된다’ 이 경험이 제 자존감을 많이 올렸습니다.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는 게 아니라, 제 권리로 받는 지원이라는 걸 몸으로 배웠습니다.
자립주택에서 살던 동안 좋은 기억도 많습니다. 특히 입주자들끼리 제주도로 여행을 갔던 일이 아직도 마음속에 선명합니다. 여러 명이서 같이 밥 먹고, 바다 보고, 웃고 떠들고. 그 시간은 제 인생에 ‘쉼표’를 찍어 준 순간이었습니다. ‘아, 나도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때 느꼈습니다. ‘그냥 견디는 삶이 아니라 즐기는 삶을 내가 살 수도 있구나.’
그리고 저는 2021년에 더 큰 변화를 선택했습니다. 자립주택 입주 기간이 끝나고, 인천도시공사의 전세임대주택으로 나왔습니다. 사실 영구 임대 아파트가 먼저 당첨이 되긴 했는데 대기 순번이 거의 200번대라, 현실적으로 바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담당자와 함께 인천도시공사 전세임대 공고(2월 공고)에 지원했고, 5월에 입주 대상자로 선정됐습니다. 그때부터 집을 직접 보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여기는 들어가기 괜찮나?’, ‘나 혼자 생활 가능할까?’ 머릿속 계산을 수십 번 하면서 발품을 팔았습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났고, 2021년 10월 28일 마침내 그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자립주택에서는 룸메이트가 있었지만, 전세임대로 나온 뒤에는 진짜로 혼자였습니다. 첫 며칠은 조용함이 너무 컸습니다. TV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외로움이 벽처럼 있었어요. 그런데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해졌고, ‘이건 내 집이다.’라는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문을 닫으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공간. 누가 기분 나쁘게 말하지 않는 공간. 누가 마음대로 나를 대신 결정하지 않는 공간. 그게 나에게 생겼다는 것. 그건 상상보다 훨씬 큰 변화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제가 자립주택에 살던 시기부터 부양의무제가 완화되면서 차상위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가 있으니까 너는 지원 못 받아.”라는 벽이 조금씩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이건 제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제도 변화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제도가 실제 사람이 사는 데 어떤 의미인지 몸으로 증명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돈에 기대지 않고, 제 권리로 받는 급여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 이건 제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존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함께 권익옹호 투쟁 집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목소리를 내는 건 단순히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저는 직접 겪었습니다. 차별을 겪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하고, “너는 원래 이런 대우를 받는 자리야.”라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싸우지 않으면 그대로라는 걸요. 누군가는 시끄럽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건 제 인생이 걸린 문제라서입니다.”
또 저는 민들레장애인야학 연극 수업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무대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저에게 또 다른 ‘말하기’입니다. 집회에서의 말이 싸우는 말이라면, 연극에서의 말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제 이야기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장애인도 연극해요?”일 수 있겠지만, 저에게는 “나는 관객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다.”라는 선언입니다.
저는 혼자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가 정해준 방식이 아니라, 제가 선택한 방식으로요. 그 과정을 ‘자립’이라고 부른다면, 저는 이제 막 그 첫 장을 넘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자립주택(들판 1호)에서 4년 6개월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천도시공사 전세임대주택에 입주해 혼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사를 두 번 한 게 아니라, 제 삶의 자리를 옮긴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돌봐지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사는 사람이 되는 자리로요.
사실 저는 예전부터 자립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허락하셔야 하지 않냐.”, “너 혼자 할 수 있겠냐.”라는 말들이 항상 저를 막았습니다. 저는 동암에 있는 장애인보호작업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일하는 곳이라기보다 붙잡아 두는 곳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적은 임금 중에서도 ‘후원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떼 갔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꼈습니다. ‘왜 우리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쌓이면서 저는 그곳을 나오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반대가 컸습니다. “그나마 거기라도 다녀야지.”, “괜히 나와서 더 힘들어지면 어떡하니.” 자립을 꿈꾸는 마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센터에서 동료상담가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조모임 관리도 하고, 다른 장애인 동료들의 고민을 듣고 함께 길을 찾는 일도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하면서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제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센터에서도 저는 차별과 인권 침해를 겪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들어간 곳에서 모욕을 겪으면서, 저는 오히려 더 확실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설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 무렵 저는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보치아 자조모임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모임의 동료상담가가 저에게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자립주택 입주를 권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여기 들어가면 이제 진짜로 집을 나오는 거니까. ‘정말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작은자야학 선생님들도 “가 보자, 네가 살 집이 있어야 네 인생이 시작된다.”고 등을 떠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부모님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혼날 각오를 하고 말했습니다. “나 자립주택에 들어가고 싶어.”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왜 이제야 얘기를 했냐?” 화가 아니라, 답답함이 섞인 말이었습니다. 반대한 게 아니라, 오히려 “민들레로 들어가라.”고 등을 밀어 주셨습니다. 어머니도 기뻐하셨고, 주변 어머니들에게까지 소식을 알려서 “우리 아이도 소개해 줄 수 있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제가 보호작업장을 나오는 걸 무서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했다, 잘 나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 활동과 장애인 인권 운동을 누구보다 크게 응원해 주십니다. 가족도 변한 겁니다. 저만 변한 게 아니라.
자립주택에 입주하고 처음에는 솔직히 쉽지 않았습니다. 활동지원서비스를 당장 받지 못했던 시기에는 빨래와 반찬 같은 기본 생활이 큰 과제였습니다. 초반에는 빨래나 반찬을 부모님 도움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빨래는 제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내가 해 볼게.” 그래서 빨래는 스스로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반찬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그게 ‘살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했습니다.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으면서 제 삶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건 단순히 집안일 도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이거 먹어.”라고 준 걸 그냥 먹는 사람이 아니게 됐습니다. 이제는 “오늘은 이 반찬 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내가 고르고 요청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빨래, 청소도 이제 활동지원사님과 함께 조율합니다. ‘부탁한다 → 된다’ 이 경험이 제 자존감을 많이 올렸습니다.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는 게 아니라, 제 권리로 받는 지원이라는 걸 몸으로 배웠습니다.
자립주택에서 살던 동안 좋은 기억도 많습니다. 특히 입주자들끼리 제주도로 여행을 갔던 일이 아직도 마음속에 선명합니다. 여러 명이서 같이 밥 먹고, 바다 보고, 웃고 떠들고. 그 시간은 제 인생에 ‘쉼표’를 찍어 준 순간이었습니다. ‘아, 나도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때 느꼈습니다. ‘그냥 견디는 삶이 아니라 즐기는 삶을 내가 살 수도 있구나.’
그리고 저는 2021년에 더 큰 변화를 선택했습니다. 자립주택 입주 기간이 끝나고, 인천도시공사의 전세임대주택으로 나왔습니다. 사실 영구 임대 아파트가 먼저 당첨이 되긴 했는데 대기 순번이 거의 200번대라, 현실적으로 바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담당자와 함께 인천도시공사 전세임대 공고(2월 공고)에 지원했고, 5월에 입주 대상자로 선정됐습니다. 그때부터 집을 직접 보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여기는 들어가기 괜찮나?’, ‘나 혼자 생활 가능할까?’ 머릿속 계산을 수십 번 하면서 발품을 팔았습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났고, 2021년 10월 28일 마침내 그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자립주택에서는 룸메이트가 있었지만, 전세임대로 나온 뒤에는 진짜로 혼자였습니다. 첫 며칠은 조용함이 너무 컸습니다. TV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외로움이 벽처럼 있었어요. 그런데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해졌고, ‘이건 내 집이다.’라는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문을 닫으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공간. 누가 기분 나쁘게 말하지 않는 공간. 누가 마음대로 나를 대신 결정하지 않는 공간. 그게 나에게 생겼다는 것. 그건 상상보다 훨씬 큰 변화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제가 자립주택에 살던 시기부터 부양의무제가 완화되면서 차상위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가 있으니까 너는 지원 못 받아.”라는 벽이 조금씩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이건 제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제도 변화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제도가 실제 사람이 사는 데 어떤 의미인지 몸으로 증명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돈에 기대지 않고, 제 권리로 받는 급여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 이건 제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존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함께 권익옹호 투쟁 집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목소리를 내는 건 단순히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저는 직접 겪었습니다. 차별을 겪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하고, “너는 원래 이런 대우를 받는 자리야.”라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싸우지 않으면 그대로라는 걸요. 누군가는 시끄럽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건 제 인생이 걸린 문제라서입니다.”
또 저는 민들레장애인야학 연극 수업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무대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저에게 또 다른 ‘말하기’입니다. 집회에서의 말이 싸우는 말이라면, 연극에서의 말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제 이야기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장애인도 연극해요?”일 수 있겠지만, 저에게는 “나는 관객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다.”라는 선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