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인으로 태어난 줄도 몰랐던 내 자아가 성립되기 전에 나는 시설에 맡겨졌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말이다. 까마득하지만 뚜렷한(?) 기억으로 6살 때였던 것 같다. 두 발과 손에 자유롭게 힘을 쓸 수 없던 나는 놀이동산에 가자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새 옷과 신발을 신고 내 몸을 아버지 등에 업혔다. 그리고는 차에 타서 한참을 가다가 산 꼭대기에 차가 멈췄고 아버지는 나를 안고 처음 보는 분들에게 인사를 시켰고 한참을 이야기 하시고는 “100밤(100일) 자고 다시 올게. 밥 잘 먹고 있어.”라고 하시며 눈시울이 붉게 인사하시고는 떠나셨다. 그렇게 나는 시설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을 울었다. 밥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울었다. 한 순간 벌어진 일이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점점 적응을 하며 학교에 진학했다. 10살,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하기엔 조금 늦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난 흘러가는 시간대로 살아 내고 있었다.
빨래 비누 냄새 나는 건빵과 쉰 냄새 나는 김치를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조금만 더 달라고 배고프다고 울며불며 말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시설과 학교에서는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악기를 배울 수 있었고, 매년 컴퓨터 대회에 출전해서 입상도 하곤 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연습할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잠시지만 시설 밖의 세상을 볼 수 있었던 나는 ‘당연한 것 또한 다를 수 있구나. 틀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설과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구나. 못 하면 질타받고 잘하면 칭찬받는 게 내가 사는 삶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여태껏 살았었는데 그게 답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시설과 학교에서 미움받기 시작했다. 내가 하기 싫은 건 안 한다고 하며 말대답을 한다고. 그래도 난 내 할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다.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들과 친구들, 형들까지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선생님은 “시설에서 잘 지내려면 말 잘 들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물음표가 수없이 많이 생겼던 선생님의 말⋯. 말 잘 들으라는 뜻은 “내 맘대로 말고 선생님 맘대로 해야 해.”라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난 소중하게 흐르는 시간을 내 눈물과 함께 흘려 보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학업에 집중할 시간도 없이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로봇처럼 삶을 버텨 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가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나 혼자 살고 싶다고 시설 원장님께 당차게 말했었는데 “네가 혼자 힘으로 뭘 할 수 있냐?”며 능력도 부족하면서 꿈은 크다고 나중에 하라고 말씀하셨던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한다.
그때 이후로 내 자존감은 지하까지 내려갔지만 꿈은 생겼다.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 가려면 성적도 성적이지만 시설에서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시설에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대학 진학을 위해 탈시설한 선배 형님이 계셨음에도 난 쉽지 않았다.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해서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 여기서 잘 컸고 잘 클 거고 책임지기 어려우시면 그냥 두세요.”라고 시설 원장이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시설 원장님께 면담 요청을 했고 원장님께 “제가 여기서 경험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경험들은 다 했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했으니 이젠 보내주세요.”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그땐 그랬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설에서 나와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얼마나 꿈 같은가⋯.
‘나의 살던 고향은 OO재활원’이라고 노래 부를 정도로 오랜 시간 시설에 있어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행복했다. 대학교 2학년 ‘장애인복지론’ 시간에 장애인 거주시설과 군대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됐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거의 똑같다라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할 때 나는 미필일 수밖에 없지만 “군대는 의무가 있고 전역 날짜가 있어 시간이 지나면 군대에서 나올 수 있지만 장애인거주시설은 의무도 아니고 한번 입소하면 퇴소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아 거기서 생을 마감하시는 분들도 계신다.”라고 말했다. 말을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을 움찔(?)하게 한 건 틀림없다.
시설 장애인이었던 나도 탈시설이 꼭 필요한가에 대해 때마다 고민했었다. 의식주가 해결돼야 하고 보호가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설에 거주해야 하는 장애인분들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은 뚜렷하다. 탈시설은 꼭 필요하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누려야 하는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탈시설은 꼭 필요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OO재활원’이라는 노래는 추억이 되었고, 시설에서 살았기에 탈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줄도 몰랐던 내 자아가 성립되기 전에 나는 시설에 맡겨졌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말이다. 까마득하지만 뚜렷한(?) 기억으로 6살 때였던 것 같다. 두 발과 손에 자유롭게 힘을 쓸 수 없던 나는 놀이동산에 가자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새 옷과 신발을 신고 내 몸을 아버지 등에 업혔다. 그리고는 차에 타서 한참을 가다가 산 꼭대기에 차가 멈췄고 아버지는 나를 안고 처음 보는 분들에게 인사를 시켰고 한참을 이야기 하시고는 “100밤(100일) 자고 다시 올게. 밥 잘 먹고 있어.”라고 하시며 눈시울이 붉게 인사하시고는 떠나셨다. 그렇게 나는 시설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을 울었다. 밥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울었다. 한 순간 벌어진 일이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점점 적응을 하며 학교에 진학했다. 10살,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하기엔 조금 늦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난 흘러가는 시간대로 살아 내고 있었다.
빨래 비누 냄새 나는 건빵과 쉰 냄새 나는 김치를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조금만 더 달라고 배고프다고 울며불며 말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시설과 학교에서는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악기를 배울 수 있었고, 매년 컴퓨터 대회에 출전해서 입상도 하곤 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연습할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잠시지만 시설 밖의 세상을 볼 수 있었던 나는 ‘당연한 것 또한 다를 수 있구나. 틀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설과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구나. 못 하면 질타받고 잘하면 칭찬받는 게 내가 사는 삶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여태껏 살았었는데 그게 답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시설과 학교에서 미움받기 시작했다. 내가 하기 싫은 건 안 한다고 하며 말대답을 한다고. 그래도 난 내 할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다.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들과 친구들, 형들까지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선생님은 “시설에서 잘 지내려면 말 잘 들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물음표가 수없이 많이 생겼던 선생님의 말⋯. 말 잘 들으라는 뜻은 “내 맘대로 말고 선생님 맘대로 해야 해.”라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난 소중하게 흐르는 시간을 내 눈물과 함께 흘려 보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학업에 집중할 시간도 없이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로봇처럼 삶을 버텨 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가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나 혼자 살고 싶다고 시설 원장님께 당차게 말했었는데 “네가 혼자 힘으로 뭘 할 수 있냐?”며 능력도 부족하면서 꿈은 크다고 나중에 하라고 말씀하셨던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한다.
그때 이후로 내 자존감은 지하까지 내려갔지만 꿈은 생겼다.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 가려면 성적도 성적이지만 시설에서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시설에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대학 진학을 위해 탈시설한 선배 형님이 계셨음에도 난 쉽지 않았다.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해서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 여기서 잘 컸고 잘 클 거고 책임지기 어려우시면 그냥 두세요.”라고 시설 원장이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시설 원장님께 면담 요청을 했고 원장님께 “제가 여기서 경험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경험들은 다 했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했으니 이젠 보내주세요.”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그땐 그랬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설에서 나와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얼마나 꿈 같은가⋯.
‘나의 살던 고향은 OO재활원’이라고 노래 부를 정도로 오랜 시간 시설에 있어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행복했다. 대학교 2학년 ‘장애인복지론’ 시간에 장애인 거주시설과 군대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됐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거의 똑같다라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할 때 나는 미필일 수밖에 없지만 “군대는 의무가 있고 전역 날짜가 있어 시간이 지나면 군대에서 나올 수 있지만 장애인거주시설은 의무도 아니고 한번 입소하면 퇴소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아 거기서 생을 마감하시는 분들도 계신다.”라고 말했다. 말을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을 움찔(?)하게 한 건 틀림없다.
시설 장애인이었던 나도 탈시설이 꼭 필요한가에 대해 때마다 고민했었다. 의식주가 해결돼야 하고 보호가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설에 거주해야 하는 장애인분들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은 뚜렷하다. 탈시설은 꼭 필요하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누려야 하는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탈시설은 꼭 필요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OO재활원’이라는 노래는 추억이 되었고, 시설에서 살았기에 탈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